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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3309
일 자
17.11.17 15:33:44
조회수
470
글쓴이
총동창회
제목 : [에세이] 미래의, 그 무엇을 위한 씨앗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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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현 동문 <간호.78>

 

미래의, 그 무엇을 위한 씨앗들

                                                                              

“꿈이 뭐니?”

어린 시절, 학교에서 장래희망을 적어내라 할 때마다 고민이 많았다.

요리사도 되고 싶었고, 화가도 되고 싶었고, 성악가도 되고 싶었다. 연극도 하고 싶었고 무용도 하고 싶었다. 칙칙폭폭 기차를 타고 온 세상을 여행하고 싶었고, 날아라 우주선에 몸을 싣고 하늘 높이 날아다니고도 싶었다. 하루 종일 골방에 주저앉아 책을 읽으며 글을 쓰는 작가도 되고 싶었다.

 

선생님은 자꾸만 가장 하고 싶은 것, 딱 한 가지만 골라 적으라시는데 고를 수가 없었다. 모두다 똑 같이 꿈꾸며 원하던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라면서 단 한 번도 꿈꿔보지 않았던 간호학을 전공하게 되었을 때 세상이 온통 무너지는 것 같았다. 학교를 다녀야 해서 열심히 다녔고, 시험을 봐야 해서 공부를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나는 일생을 의롭게 살며 전문 간호직에 최선을 다 할 것을 하느님과 여러분 앞에 선서합니다. 나는 인간의 생명에 해로운 일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간호의 수준을…….” 촛불을 밝히고 나이팅게일 선서문을 낭송하는 순간 목안이 울컥, 가슴이 뜨거워졌다.

 

내가 지금 왜, 이 자리에 이렇게 서 있는 걸까. 자라는 내내 단 한 번도 꿈꾸지도 않았고 원하지도 않았던 간호사의 길을 걷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알지 못하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그 어떤 의미가 숨어 있는 건 아닐까? 그 어떤 의미를 찾고 싶었고, 그 누군가를 위한 삶이 되고 싶어 선택한 곳은 작은 사슴 섬, 소록도였다.

하지만, 소록도에서의 생활은 뜻밖이었다.

“비록 이 몸이 죽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

전쟁터에서 부상병들을 간호하며 외쳤던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처럼은 아닐지라도 나의 간호를 받는 사람들의 안녕을 위하여 마음 다해 봉사하며 헌신해야겠다는 각오를 부끄럽게 했다. 가족들과 지인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큰 맘 먹고 결정한 소록도행에 비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참으로 미미할 뿐이었다. 내가 행하는 것보다 몇 십 배나 많은 것들이 내 안으로 차곡차곡 들어와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무심코, 아무런 생각 없이, 친구의 손을 잡고, 사랑하는 사람과 포옹을 하고, 한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는 것과 같은 우리의 일상들이, 또 다른 사람에게는 딱 한 번만이라도 이루고 싶은 간절한 소망임을 알게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 숨을 쉬고, 하늘을 보고, 길을 걷고, 먹고, 말하고…, 나에게 주어진 모든 일상들이 참으로 감사한 일임을 알게 되었다.

“작가님, 어떻게 이렇게 잘 아세요? 엄마들이 뭘 궁금한지, 뭘 알고 싶은지요.”

“정말 신기해요. 키 크려면 일찍 자야 한다고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던 아이가, <키 크는 그림책>을 읽더니 스스로 알아서 일찍 잔다니까요. 키 크려면 일찍 자야 한다고요.”

글을 쓰는 작가가 되어, 건강에 관한 그림책을 출간하며 또 다시 깨닫게 되었다.

아이들이 키가 크려면, 이가 튼튼해지려면, 엄마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엄마들이 뭘 궁금해 하는지, 뭘 알고 싶어 하는지, 잘 알 수 있었던 건 30년 넘게 걸어온 간호사의 길 덕분이었다. 엄마들의 잔소리를 대신해 주는 고마운 책이라는 칭찬을 받을 수 있었던 것 또한 수많은 엄마들과의 상담을 통해 이루어낸 것들이었다. 단 한 번도 꿈꿔보지 않았던, 희망하지 않았던 길이었지만 그 또한 내 삶에 피가 되고 살이 되기 위한 고마운 길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생각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그 어떤 순간도 필요 없는 것들은 없다는 생각이다.

아픔도 절망도 상처도 실패도 또 다른 미래를 위한 씨앗들이라는 생각이다. 한 움큼의 씨앗을 땅속에 심어놓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지금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게 아무것도 없다 할지라도 끝이 아니다. 작은 씨앗 하나 심어놓고 물을 주고 거름을 주며 기다리다 보면, 어느 사이 초록이 움트고 꽃이 피는 것처럼, 지금 이 순간 춥고 어둡고 팍팍할지라도 언젠가는 웃음이 나는 순간들이 올 거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희망한다.

우리 모두 함께 어서 빨리 나아가기를. 용기와 끈기와 열심이 있는 자만이 기다리는 곳, 날마다 씨익, 웃음이 나는 따뜻한 세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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