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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자
17.12.26 17: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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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동창회
제목 : <동문칼럼> 조영무(회계학.85) 트레킹회 정기산행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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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무(회계학 85)

역시 산이 좋다

 

말로만 듣던 너릿재옛길을 걸었다

주차장 ㅡ 너릿재 ㅡ 너와나의 목장 ㅡ 용연마을 ㅡ 주차장

<이 순간을 위하여!!!>

12월이다. 해마다 어김없이 찾아오지만, 그 느낌은 항상 다르다.

 

매서운 바람이 불어 날씨는 사나워지고, 그것을 막느라 우리의 옷은 두터워진다. 그와 더불어 우리의 마음도 한 해를 보내는 아쉬움과 새 해에 대한 기대를 동시에 품게 된다.

 

55살, 적지 않은 나이이다. 그 동안 쉼없이 전진해 왔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짧은 영광과 기쁨도 있었지만, 고통은 길었고 깊은 회한과 진한 아쉬움이 더 많았다.

 

한신이 시정잡배의 가랑이 사이를 긴것과 같은 굴욕과 모욕의 시간도 많았다. 지우고 싶은 기억들이 많다. 그런데, 그런 아픈 기억일수록 잊혀지지를 않고 나를 괴롭히는 트라우마가 되어서 반복적이고 지속적으로 나를 괴롭힌다.

 

“앞에 큰 바위가 가로 막고 있다. 애벌레가 그 장애물을 넘으려고 갖은 애를 쓰고 오르고 올라 정상을 넘으려는 찰나에 마지막 힘이 부쳐 땅으로 굴러 떨어지고 만다.

 

다시, 그 애벌레가 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서 험난한 여정으로 정상에 도전하지만 또 그 높은 벽을 극복하지 못하고 땅에 떨어진다.

 

애벌레는 영원히 바위를 넘을 수 없는 것일까.

 

방법은 단 하나,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것이다,

 

나비는 몇 번의 날개짓으로 그 바위를 훌쩍 뛰어넘고 만다”

 

1983년, 여름 충장로 우다방에서 고교동창이 재수에 연연하는 나에게 “명문대 가는 것 별 의미없다”며 전해 준 말이다.

 

그 시절 우체국 앞을 우다방으로 불렀지만, 실제로 우체국 건너편에 우다방이 있었다.

 

그 친구는 조선대학교를 다녔는데, 1982년에 조선대학교 문학상 대상을 받았단다. 1학년이 그 상을 받은 것은 그 대학 역사상 자신이 처음이라며 강한 자존감이 베어 나왔다. 거기다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어 라이터에 불을 붙여 위로 연기를 내뿜으며 흡족해 하던 그 친구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로부터, 34년이 흐른 지금은 나는 애벌레에서 나방으로 진화하였는가. 아니다. 여전히 나방이 되지 못하고 애벌레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신미숙아에 머물고 있다.

 

이런 아쉬움속에서 전대동창트레킹회 금년 송년 산행에 나섰다.

 

어제 밤 고등학교 송년회에서 새벽 1시까지 어울렸다. 다행히, 몸과 마음 통제가 잘되어서 적당한 음주로 끝났다. 막판, 상무지구에서 웃돈을 언져 주고도 대리운전 부르기가 힘들었지만,,,

 

산행 당일 아침, 컨디션이 그런대로 괜찮았다. 시간은 9시 40분을 넘어서고 있었다. 총무 경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10분 정도 늦을 것 같네”

 

외곽도로에 진입하여 어느 정도 한숨을 돌렸다. 쭉쭉 뚫린 도로로 타고 화순방향으로 접어 들었을 때 까지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집결지인 선교동 입구를 못찾고 화순 너릿재를 통과하고 말았다. 한 참을 가도 유턴을 할 수가 없었다. 입에서 “××” 욕이 나올려고 한다.

 

겨우, 유턴을 하여 너릿재를 돌아오니, 여기도 유턴을 할 곳이 안보인다. 소태동에 들어서야 유턴을 할 수 있었다. 마침내, 집결지에 도착해 보니 아무도 안보인다.

 

경민에게 전화하니 제2 수원지로 올라가는 천변을 따라 올라오라 한다. 약간 서두러서 쫒아가니, 경민이 보이고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의 손은 우측을 향하고 있었다. 오른쪽으로 돌아라는 의미이다.

 

드디어, 경민을 만나게 되고 말로만 듣던 너릿재 옛길에 접어들었다. 오래전에 포장을 한 도로이지만, 바닥이 닳아지고 오래되어서 흙길에 비유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정감이 우러 나왔다. 주위 경관과 어울려서 바위에 이끼가 낀것처럼 약간의 관록도 느껴지고 고풍스러웠다.

 

과거에는 버스도 지나다녔다던 그 도로는 지금 보니 승용차 한 대가 지나가면 족할 만한 길이다. 그 길을 버스들이 오고 갔으니, 당시의 그 기사들은 운전의 천재들이었던 모양이다.

 

또 그전에 이 길은 숱한 화제와 전설을 낳은 길이었다.

 

경민의 발걸음이 빠르다. 앞서간 일행의 뒷 꽁무니가 안보이니 서둘러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발뒷꿈치를 따라가니 너릿재에 도착하였다. 강훈열 회장님이 일부러 30여미터나 내려와서 반갑게 맞아준다.

 

나 때문에 늦어서 황송하고 죄송하다.

 

산악대장 영필이가 건네 준 귤울 하나 까서 먹으니, 달콤하게 내 몸에 스며든다. 길을 잘못들어서 받은 스트레스가 깨끗이 씻어진다. 기다리다 지친, 자칭 까칠이 후배는 벌써 반화에 불을켜고 배너에 물을 끓이며 한 잔 들이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는 체도 하지 않는다. 아마도, 별것도 아닌 선배가 늦은 것에 대한 불만도 있으리라.

 

전라도 관찰사를 역임한 옛 시인의 시 “광주읍루” 가 돌에 새겨져 있었다. 

 

광산의 형세 뛰어나 아름다운 곳/ 옛날을 생각하는 듯 유연하여라/ 부라 일컬은 건 어느 때 였을까/ 광주로 승격된 그 해를 묻노라/ 산천은 빼어나 한도에 웅장하고/ 풍성한 민물속에 어진이가 많아라/ 서쪽 마루 끝이 넓음을 깨닫고/ 높은 누에 올라 짧은 글로 칭송하노라

 

이제, 본격적으로 산행이 시작된다. 지장봉을 향하여 오르기 시작하였다. 등산로에 낙엽이 양탄자처럼 푹신하게 깔려 있었다. 오르막 길에 접어들면서 종아리에 약간 힘이 들어가면서 근육이 움직이고 온 몸에 약간의 땀이 흐르면서 마음이 너그러워 지고 엔돌핀이 쏟는다.

 

아, 이 맛에 산에 오르는 것 아닌가.

저 땅아래에서의 숨 막히는 삶의 다툼을 이 순간이나마 잊혀진다. 몸과 마음이 자연스레 정화된다.

 

시몬의 낙엽밟는 소리가 차분하게 대자연과 사랑을 음미하는 것이라면, 산행에서 낙엽을 밝고 오르는 것은 나의 정령과 교감을 나누는 것이다.

 

오늘 산행에 참여하기 위해서 강원도에서 내려온 후배 부인의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강원도 태생으로 전라도 남자에게 시집왔지만, 아직도 그곳에서 살며 교편을 잡고 있다는 그녀는 남편이 광주에서 직업학교를 운영하게 되면서 늘그막에 주말부부를 하고 있단다.

 

지장봉에 올라서, 화순 지역을 아래로 굽어보니 아기자기하게 연결된 산과 들에 안개가 걸쳐있었다. 한 폭의 산수화가 먼 시야속에서 아득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조금 더 올라 수레봉에서 점심이 시작되었다. 산행에서의 식사는 항상 성찬이다. 여러 사람의 도시락을 까면, 다양한 음식들이 쏟아진다. 그 중에서 강원도에서 가져 왔다던 횡성 더덕의 맛이 일품이었다. 진한 향이 베어나고 식감은 설탕처럼 부드러우면서도 쫄깃했다.

 

술은 사양했다. 전대동창트레킹회 돌림잔은 상당한 전통을 자랑하는데, 아쉽지만 오늘 거절했다. 산에서 술먹고 목숨을 잃을 정도로 위험한 일을 당한 이후로 많이 조심한다. 요즘에는 마음이 끌리지 않으면, 술은 과감하게 사양한다. 아마도 나도 조금 늙어 가면서, 매사에 조심한다.

 

몇 번의 돌림잔이 돌아가고 점심이 마무리 되었다. 만연산을 향하다가 정상 아래에서 너와나의 목장 쪽으로 좌회전하면 된다. 그런데 주위를 살펴보니 7명 밖에 보이질 않는다. 오늘의 7인의 용사이자, A코스 팀원들이다.

 

강훈열회장님이 앞장서고 강원댁과 그 신랑이 따르고 나는 최원장님과 후미에 섰다. 그러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법대를 졸업하고, 뜻한 바 있어서 30대에 한의대에 진학하였단다. 남들은 다 비웃었지만, 담양에서 학원을 경영하며 처자식을 먹여살리면서 나주까지 한의대 6년을 다녔단다. 30대를 치열하게 산 것이다.

그 얘기를 듣고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30대에, 나는 조그만 시골 전문대학 교수로 지나면서 하루가 멀다하고 술에 쩔어서 살았다. 학문에 더 정진해야 할 시기에, 술과 가무로 황금의 시간을 탕진하고 말았다. 내 인생에서 가장 안타까운 시절이다.

 

나의 철없는 시절의 무모한 도전 얘기를 하다보니, 너와나의 목장에 도착하였다. 몇 년전에 와 본 적이있는 그곳이었지만, 이제 주위 경관이 말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위를 올려다 보니 장불재 백마봉이 보였다. 강회장님의 설명이 이어진다. 가을 억새가 바람에 휘날리면 백마의 깃털처럼 보인다고 해서 백마봉으로 불리게 되었단다.

 

바로, 용연마을 향해서 하산을 시작하였다. 수백마리로 보이는 흑염소들의 무리가 보이고 그 중 몇 마리가 울어대고 있었다. 조금 더 내려오니, 녹슨 철책이 둘러 쳐 있었다. 아마도 그곳이 사유지인 모양이다. 그냥 넘기에 약간 부담스러웠다.

 

우리의 강회장님이 손으로 그 철책을 누르고 있었다. 강원도 소녀아줌마가 그 선을 넘고 나도 넘었다. 이것이 바로 ‘섬김의 리더십’ 아닌가.

전남대학교동창회트레킹회 회장님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리라. 강훈열 회장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존경합니다.

 

쌓인 낙엽과 돌무리들에 미끌리지 않도록 신경쓰다 보니, 어느 덧 용연마을에 닿았다. 무등산을 뒷배경으로 한 전원주택 사이를 기분좋게 지나서 선교동 정자에 도착했다. 그런데, 아무도 안보인다.

 

7인의 용사가 정자에 걸터 앉았다. 거기에는 30대의 앳띤 용모를 지닌 후배가 있었다. 몇 살이냐고 물었더니, 42살 이란다. 그 나이에, 무모하게 총선에 뛰어들었던 얘기를 하면서 이젠 그때의 패기가 없다고 한탄하였다. 그랬더니, 직업학교를 운영하는 후배가 나섰다. 100세 시대의 나이는 생물학적 나이에 0,7을 곱하면 된단다.

 

그 방법으로 내 나이를 계산해 보니, 놀랍게도 38.5세였다. 내가 총선에 뛰었던 나이보다도 무려 3.5세가 낮았다.

 

충격이었다. 사그러 들었던 패기와 욕망이 다시 살아난다.

일행들이 다시 모였다. 다음 약속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섬김의 리더십을 보여주는 강회장님과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하는 강총무를 외면하고 산행만하고 가버리는 것은 무정한 것이다, 예의가 아니다.

 

소태동 식당에서 조촐한 뒷풀이가 시작되었다. 술잔이 몇 순배 돌아가니 기분이 좋아졌다.

건배사가 이어지고 최원장님 차례가 되었다.

 

“이 순간을, 위하여”

간결하면서도, 멋진 건배사였다.

 

내 인생은 항상 마무리를 짓지 못했다. 항상 “다음에 한번 더, 내일”이라는 여운을 남겼다. 그러다가 55살이 되고 말았다. 내게 무엇이 남았는가. 과거는 무엇이고 미래는 또 무언가. 오직 현재가 있을 뿐이다.

 

오늘 부터는 38.5세가 아닌가.

과거에 이러쿵, 저리쿵 하는 것 싫다. 과거에 금송아지 안가지고 있었던 이가, 누가 있는가. 이 불확실한 인생사에 미래의 일을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

 

현실에 충실하는 것이다. 오늘 하루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다. 그 이후는 자연스럽게 하늘에 맡기는 것이다. 그냥 흘러가는 자연속에 묻히면 되는 것이다.

 

지난 ‘크로노스 타임’은 어쩔 수 없지만, 남은 시간을 ‘카이로스 타임’으로 만들면 되는 것이다.

“Carpe diem 이 순간을 충실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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