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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 수필> 황호부 동문 ' 흔 적 '

작성일
2020.12.29
수정일
2020.12.29
작성자
총동창회
조회수
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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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 적


飛松 황호부(임학, 63)

 


감사원에서 33년을 근무하고 2004년 6월 명예퇴직이란 이름으로 감사원을 떠난 지 벌써 17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다. 퇴직 후 잠시 모 금융회사에서 상근감사직으로 근무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고향에서 부모님이 경영하시던 농원을 인수받아 감과 매실 농사를 지으며 하늘에 유난히도 빛나는 별과 달, 실개천에 흐르는 개울 물소리와 바람을 벗 삼아 시간을 보냈다. 그곳은 산촌이라 물이 맑아 달이 와서 쉬고 나무에는 새가 날아와 둥지를 틀어 내가 농사를 짓고 살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힘에 부쳐 농사를 남에게 맡기고 보니 이제 인생의 종착역에 이르렀다는 생각이 든다. 나이 들어 남는 것은 시간뿐이라 젊은 시절 33년 동안 “공명정대”를 정신적 지주로 삼고 열심히 일했던 삼청동 시절이 떠오른다. 17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지금의 감사원에 그 흔적이 과연 얼마나 남아 있을까 생각하며 지난날 감사원 생활을 반추해본다.

 


사명감을 가져라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살다 간 세상에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고, 그 흔적들은 인류가 기록으로 남겨 역사가 되었다. 또 그 흔적은 공동체의 삶과 어울려 정신과 사상으로까지 치달아 올라가서 문화 또는 문화유산이 되기도 한다.

지금은 작고하셨지만 1970년대 초 군정시절 국가재건최고회의 법사위원장과 내각사무처장을 역임했던 이석제씨가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고 감사원장(5대, 6대, 1971~1976)으로 부임하였다. 이석제 원장은 부임하자마자 감사원 조직을 쇄신해서 공직기강을 바로 잡겠다는 생각을 실천에 옮겼다. 먼저 이를 위해 공직자를 감사하기에 부적합하다고 평가한 감사원 직원 100명 이상으로부터 사직서를 받았다.

 

그 이후 부족한 인력을 보충하기 위해서 공개채용 방식으로 7급 감사직 직원을 1971년도에 40명, 1972년도에 80명을 뽑았다. 나는 1972년도 제2기 공채로 임용되었는데, 그때 무려 6,000명이 시험에 응시하여 75:1의 경쟁률이었다. 1973년 1월 한 달 동안 감사원에서 신규직원 교육을 받았다. 드디어 1973년 2월 15일 임명장을 받고 근무하기 시작했는데, 교육 중에 신두영 사무총장(7대 감사원장 역임)이 특강시간에 하신 말씀이 감사원 근무 시 두고두고 뇌리에 잔상으로 남아 있었다.

“여러분들은 앞으로 감사원을 이끌어나갈 기둥이 될 것이다. 부족 인력을 다른 부처에서 충원할 수도 있었지만 감사원의 먼 장래를 내다보고 공개채용 방식을 선택해서 여러분을 선발했다. 사명감을 가지고 근무해주기 바란다.”

 

이 말씀은 80명 동기생들 대부분이 30여 년 감사원에 근무하면서 감사원 직원으로서 사명감을 불러일으키는 정신적 주춧돌이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석제 원장은 감사출장을 나갔을 때 대상기관에서 커피 한 잔도 신세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엄명을 내리셨다. 우리 공채 1기, 2기들은 오랜 기간 동안 이석제 감사원장과 신두영 사무총장의 말씀을 금과옥조로 삼으며 일했다. 그 당시 감사원 전체 감사인력 600여 명 중 신규로 감사직 7급에 채용된 인원 120명이 젊은 혈기로 새바람을 일으켰기에 감사원의 공직기강이 확립되었고 청렴기관으로 자리매김했다고 생각한다. 

 

감사원 직원으로 임용되고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는 공채 1기, 2기들이 감사원 과장으로 보직 받은 숫자가 전체 과장보직 인원 55여 명의 대부분을 차지했는데, 신두영 총장 말씀대로 이 때 공채로 선발한 직원들이 감사원의 기둥역할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감사원에서 꽃이라 불리는 과장 보직은 실지감사를 나갔을 때 감사반장 임무를 수행하면서 감사현장에서 감사방향을 제시하고 감사관이 적출한 감사사건에 대해서 사건성립 여부를 검토하는 등 상당히 중차대한 감사업무를 수행하기 때문이다.

 


좋은 감사의 요건

나는 33년 동안 감사원에 재직하면서 출장을 나갈 때마다 좋은 감사라고 인정받을 만한 사건을 어떻게 적출할 것인가 고민했고 이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기도 했다. 사실상 좋은 사건을 적출하기 위해서는 사무분장을 받은 감사관이 스스로 많은 고민과 연구를 하고 감사에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 감사는 분석적 기법을 활용한 능률성 감사나 효과성 감사 보다는 합법성 감사결과 성과품이 어디에 내놓아도 인정받을 만한 사건이 된다는 것은 감사원 감사관이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 당시 감사원에서는 직원들이 실지감사에서 적출한 사건 모두를 평가했다. 그래서 직급별로 1번에서 말번까지 등위를 매겼고 상위 서열에 오른 직원에게는 분기별로 감사원장 표창을 수여하였으며, 이 직원은 근무성적평정에서도 유리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래서 직원들 대부분은 좋은 사건을 적출하는데 자신의 모든 시간과 노력을 쏟아 부었다.

 

나도 부감사관 시절에는 좋은 사건을 적출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서류를 싸들고 집에 가서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그래서 적출사건 평가결과 여러 번 상위 5위 이내에 들어 감사원장 표창(6회)과 대통령 표창(1회)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것들이 내가 감사원에 재직할 때 열심히 일했노라 자부할 수 있고, 내어놓을 수 있는 흔적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제도가 감사적출 동기를 부여하는 측면에서는 좋은 점도 많았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지금은 어떻게 운용되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아이디어로 때로는 감사자문으로 해결한 감사 사항 몇 가지

감사하면서 어떤 때는 즉흥적인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사건을 적출하는 경우도 있었다. 농림부 감사담당과에 근무할 때였다. 정부의 비육우 육성정책 자금이 농협을 통해 비육을 목적으로 한우를 구입한 농민들에게 지원되었다. 당시 은행에서 대출받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웠는데, 정책자금 금리는 시중은행 금리보다 훨씬 저렴해서 소를 키우지 않는 농가가 농협직원, 시·군 공무원과 결탁해 자금을 인출해 쓰는 경우가 많다는 정보가 감사원에 접수되었다.

 

농협 감사를 할 때 비육우 육성자금을 받은 농가가 소를 키우고 있는지 현장 확인을 나갔다. 그런데 외양간에는 소가 없었다. 주인은 “집 밖 100m 떨어진 곳에 매어둔 소가 우리 소입니다”라고 말했다. 누구네 소인지 주인을 확인할 방법이 딱히 없었다. 한참만에야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소는 말뚝에 매어둔 고삐를 풀어주면 자기 집을 찾아가는 습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이를 실행해서 소의 주인을 찾았고, 이를 근거로 부당하게 자금을 지원받았다는 확인서를 받기도 했다.

 

또 감사대상기관의 행위가 상식을 벗어난 경우에는 전문가의 자문을 받아 사건을 적출하는 경우도 있었다. 한국산업은행 정기감사를 나갔을 때의 일이다. 그 당시 해운경기가 바닥을 헤매고 우리나라 해운산업은 선복량 과다로 도산하는 해운회사가 비일비재하게 발생하고 있었다. 그래서 정부는 해운산업 합리화란 명목으로 강제로 구조조정을 단행하게 되었다.

 

이에 따른 조치의 일환으로 AA해운사 소유 선박 해바라기호를 BB해상 소속으로 돌려 해운회사 수를 감소시킴과 동시에 산업은행은 대출 당시 선박가격이 135억 원에 이르렀던 해바라기호의 현재가치를 20억 원으로 재평가하고, 이 배를 담보로 빌려주었던 대출금 130억 원을 현재가치 할인방식에 의해서 무이자로 20년 후에 130억 원을 상환하도록 조치하였다. 

 

결국 BB해상은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현가 20억 원의 선박을 소유하고, 매년 갚아야 할 이자까지 합하여 20년 후에는 원리금 130억 원을 산업은행에 갚으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런 손해가 없는 해운산업 합리화 정책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조치가 끝나고 배를 인수한 후 한 달 만에 이 선박은 부산 앞바다에서 태풍으로 좌초되고 말았다. BB해상은 보험사로부터 자회사 소유 선박이 좌초되었다고 보험금 135억 원을 수령하였다.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선박을 인수하였다가 135억 원의 보험금을 수령했고, 20년 후에 이자 없이 130억 원을 산업은행에 갚으면 되는 횡재를 한 것이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 일을 그냥 보고 넘길 수만은 없었다. 사건을 깊이 있게 조사해 봐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좀 더 자세히 살펴보니 산업은행은 이 선박에 질권(pledge)을 설정하면서 선박 운행 중 작은 사고가 발생한 경우에는 해운 회사가 보험금을 수령하여 선박을 수선하도록 하였으나 수선을 할 수 없이 전파(全破)된 경우에는 산업은행이 보험금을 수령하도록 약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BB해상은 선박이 태풍으로 좌초된 이 사건을 “합의(compromise)에 의한 전파(全破)”로 둔갑시켜 “전파”가 아니라고 보험금 135억 원을 수령한 것이다. 나는 보험전문 국제변호사에게 자문을 구하여 “합의에 의한 전파”나 “전파” 는 사실상 동일하다는 사실을 입증하였다. 그 결과 BB해상이 받은 보험금 135억 원을 산업은행이 돌려받도록 시정하고, 책임을 물어 산업은행 담당부장을 징계조치했다.

 

이렇게 33년이라는 길다면 긴 세월 동안 감사원에서 감사에 매진하다가 지금은 야인이 되어 세월의 뒤안길에 나홀로 앉아 있다. 공자는 인생 70세에 종심 (從心)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했다. 그 나이에 이르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혹은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마음이 원하는 대로 하여도 어떤 규율이나 법도에 벗어나거나 어긋나지 않았다고 했다(七十而從心所慾 不踰矩, 논어 위정편). 지금 내 나이가 70세를 훨씬 넘었다. 과연 종심, 즉 내가 마음먹고 행한 어떤 행동이 법도에 어긋남이 없을까? 지금 우리의 나이가 종심에 이르러 행동이 진중해져서 그러하기도 하겠지만 사실상 나이가 많아서 하는 일이 많지 않아 문제가 될 만한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리고 업무 추진력은 젊었을 때와 비교도 되지 않는다.

 

감사원에 근무할 그때 혈기 왕성한 젊음이 충만하던 시절 우리가 공명정대를 정신적 주춧돌로 삼고 매진했던 그 흔적들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그 것들은 감사원이라는 조직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생각해본다. 이 흔적들이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대부분 기억에서 사라지고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증발되어 버리진 않았을까? 물론 그러할 것이다. 우리가 남긴 흔적은 희미해졌을 것이다. 우리가 남긴 흔적들이 모두 사라지고 흩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서운한 마음이 머리를 맴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 흔적이 우리 후배 감사인들에게 정신적 토양으로 남아 지금의 감사원이 존립하고 버티는 힘이 되고 있겠지 자위해 보면서 오늘 하루를 숨 쉬고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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